다문화뉴스

[끝나지 않은 귀환, 사할린의 한인들·1] 한인 이주 및 영주귀국 역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89회 작성일 15-10-20 11:41

본문

[끝나지 않은 귀환, 사할린의 한인들·1] 한인 이주 및 영주귀국 역사

경인일보 창간 70 특별기획
강제징용 ‘눈물의 70년’… 대한민국 ‘그늘’ 재조명해야

강기정 기자

발행일 2015-10-05 제3면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은 농사를 지어 작물을 재배해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사진은 지난달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진행한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새고려신문 제공

 

1940년대 초 대거 이주 광복후 4만3천여명 ‘타향살이’
1990년 한·러수교 귀향 물꼬… 현재 3022명 국내 거주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이 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배는 오지 않아 /하릴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 마냥 흩날려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코르사코프 위령탑 비문 (김문환 씀)>

사할린 섬 남쪽의 항구 도시 코르사코프에는 대일항쟁기 당시 일본령이었던 이곳에 강제 징용돼 끝내 돌아가지 못한 한인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인들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당시 일본으로 향하는 배가 다니던 코르사코프 항으로 몰려들었다.

일본인들은 하나 둘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타고 떠났지만, 그들을 위한 배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할린 섬에 남겨진 이들만 4만3천여명이었다.

■ 10만 조선인의 무덤…그리고 4만3천여명의 또 다른 ‘집’ 사할린

=사할린은 러시아 극동지방에 위치한 섬으로 러시아 본토의 동쪽,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 특성상 오랫동안 두 나라간 영유권 다툼이 이어졌고,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사할린 남부지역이 일본에 귀속됐다.

석유·석탄 등 자원이 풍부해, 일본은 1930년대부터 현지 한인들과 조선 내 노동자들을 모집하거나 강제 징용해 석탄 채굴에 나섰다. 사할린에 한인이 대거 이주한 것은 1940년대 초. 국가기록원 등에 따르면 이 당시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15만여명의 한인이 사할린에 끌려왔고 상당수는 탄광 등에서 일하다 숨졌다.

일본 규슈 등으로 이중 징용되는 한인도 3천여명이었고, 소비에트 연방이 관할하던 북부지역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등으로 강제이주됐다.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기준 사할린 한인은 4만3천명으로 집계됐다. 어림잡아도 사할린은 10만명의 ‘무덤’이 된 셈이다. 남은 이들도 끝내 고향에 가지 못했다.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당시 국적이 일본이었던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의 2차대전 패전 후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며 ‘무국적’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탄광이나 공장에서 일하거나, 꽁꽁 언 땅을 파 농사를 지어 기른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말 대신 러시아말이 몸에 배었고 아들과 딸이 자라 손자가 태어났다. 사할린주 정부 등에 따르면 현재 사할린 섬에 거주하는 50만여명 중 한인은 2만4천명 가량이다.

 

 

■ 50년 만의 귀향

= 사할린에 남은 한인들의 눈물겨운 ‘귀향’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을 상대로 귀환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고, 러시아 정부에 귀국을 요구하다 북한으로 추방된 한인들마저 있었다. 1988년 일본 외상이 사할린 한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1990년 한·러 수교가 시작되며 귀향의 물꼬가 트였다.

수교가 이뤄지던 해 사할린 한인 120명이 거의 5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개별적인 영주 귀국이 시작됐고, 한·일 양국 역시 주택·요양시설을 조성해 사할린 한인들의 귀향을 돕기로 했다. 귀국을 지원하는 대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출생한 이른바 ‘1세대’ 한인들로 한정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출생했거나 1세대의 자녀인 ‘2세대’ 한인들은 장애인, 또는 1세대의 배우자인 경우에만 두 나라의 지원을 받는 영주 귀국이 허용됐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1990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은 모두 4천293명이다.

일부는 숨지고, 또 일부는 사할린으로 되돌아가 지난 6월 기준 국내에서 3천22명의 동포가 ‘고향 살이’ 중이다. 이 중 영주 귀국 초창기에 사할린 동포를 위한 요양시설·임대주택이 조성됐던 경기도에는 현재 1천430명이 거주 중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다. 인천시에는 경기도 다음으로 많은 627명의 동포가 거주 중이다.

귀향한 한인 10명 중 6명 이상이 경기·인천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대한민국의 ‘그늘’ 사할린 한인들의 모습을 경기·인천이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끝나지 않은 귀환, 사할린의 한인들·2] 문화적 차이 극복 과제

경인일보 창간 70 특별기획
1940년대 멈춘 사할린 시계… 언어·문화 격차 ‘고립된 섬’

강기정·김환기·정운 기자

발행일 2015-10-06 제3면

 

1990년 한·러 수교로 사할린 한인들은 50여년만에 처음으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사진은 첫 귀국 길에 오른 사할린 한인의 모습으로,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진행 중인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새고려신문 제공

 

한인 “차가운 시선” vs 이웃 “되레 역차별” 하소연
건강 더불어 의사소통·부적응 문제 어려운점 꼽아


러시아 사할린과 한국의 표준시간은 꼭 1시간 차이. 그러나 사할린 한인 2세(1세의 자녀 중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자)인 장태호(65) 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대 교수는 “사할린 한인과 한국인간 언어·문화적 시간 차는 50년”이라고 말했다.

광복을 맞은 조국의 배는 수십 년 간 닿지 않았고 사할린의 한국 시계는 1940년대에 멈췄다. 해방 후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북한의 문화와 교육이 유입된 것도 사할린 한인과 고국 간의 문화적 시간 차를 더욱 벌려놨다.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사할린 한인들은 2000년대가 아닌 1940년대에 서 있었다. 이들이 말을 건네면 한국인 이웃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50년 만에 귀향한 사할린 섬의 한인들은 고국에서도 이웃들과 섞이지 못한 채 고립된 ‘섬’이 됐다.

■ 어울리지 못하는 ‘이웃’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는 사할린 한인 450여명이 살고 있다. 2007년 귀국한 이들이 대부분인데, 동포들의 ‘따가운 시선’은 8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 편에 남아 있다. 5일 오후 논현동 달맞이마을 쉼터에서 만난 진영자(77·여)씨는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면서도 ‘한국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을 잊지 못했다.

“우리가 원해서 사할린에 살게 된 것도 아니고, 고국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국에 왔는데, 사람들은 ‘왜 왔냐’는 식으로 안 좋게 봤다”며 “러시아에서 차별받는 것은 다른 민족이니까 견딜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같은 민족에게서 받은 차별은 러시아에서보다 더 힘들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반면 한국 이웃들은 “차별받는 것은 우리”라고 하소연했다. 이날 양주 회천4동에서 만난 한 할머니(72)는 “아픈 역사야 잘 알지만 우리는 조국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라며 “잘 지내려고야 하지만, 솔직히 같은 이웃인데 사할린 한인들에게만 지원이 집중되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사할린 동포의 거주지를 ‘그들만의 세상’이라고 부르며, 아예 무관심한 이웃도 있었다. 사할린 동포들이 모여 사는 안산 고향마을 바로 옆 아파트에서 만난 김모(37·여)씨는 “사할린 어르신들이 우리 아파트 상가에도 자주 오고 산책도 하시는데 별로 마주칠 일이 없으니 신경을 안 쓴다”고 말했다.

인천 남동사할린센터 신동식 노인회장은 “(사할린 한인들과 한국 이웃들 간) 서로 적대적인 감정은 없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많고 다른 문화에서 살았던 기간이 길다 보니 가까워지기가 쉽지는 않다”고 했다.

■ 고국에 와서도 말·문화 다른 ‘이방인’

올해 초 한국세계지역학회의 ‘세계지역연구논총’에 실린 전남대 임채완 교수·이소영 박사의 논문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생활환경과 정책적 욕구’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전국 영주귀국 동포 2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귀국한 한인들은 한국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건강·의료문제(36.1%)와 더불어 의사소통 및 문화 부적응(33.2%)을 꼽았다.

2000년에 안산 고향마을로 영주귀국한 장일삼(83) 할아버지는 “북한 말투가 섞여있다보니 한국인들이 깜짝 놀라더라”며 “몇 번 그런 경험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말을 하기가 꺼려지는데, 거기에 러시아말을 섞어 쓰기 때문에 대부분 동포들은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상당수 사할린 한인들이 지역사회에서 동떨어지는 데도 한몫을 한다. 설문조사에서 수도권에 사는 한인들 중 지역 주민과의 모임에 참여하는 경우는 50.6%였다.

나머지 49.4%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는데 정보가 부족했거나(39.6%),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37.4%) 외에 언어·문화적 이질감 등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환기·정운·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끝나지 않은 귀환, 사할린의 한인들·3] 이산의 연속

경인일보 창간 70 특별기획
귀향, 그리움도 따라왔다

정운·김환기·강기정 기자

발행일 2015-10-13 제1면

 

 인천시 연수구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10년째 생활하고 있는 강정순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사할린에서 겪었던 이산의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강제 징용된 가장 찾아 온 가족
규슈로 3천여명 전출 ‘또 생이별’
평생 꿈꾼 고국 영주귀국 하니…
이번엔 두고 온 자식 ‘눈에 아른’

사할린 한인들의 삶은 ‘이산(離散)’의 연속이었다. 처음은 일제 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로 징용을 당하면서였다. 이별의 슬픔을 겪던 한인들은 이후 가족들이 사할린으로 와 함께 살게 됐지만, 1944년 일본은 사할린의 한인 노동자 3천여 명을 일본 규슈지역으로 전출시켰다.

이때 전출당한 한인들의 가족들은 사할린에 남아 또 한번의 생이별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이후 영주귀국을 했지만, 역시 자녀들과 헤어져야 했다. 영주귀국 대상자가 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강정순(84) 할머니의 삶에는 사할린 한인들이 겪었던 이산가족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Copyright 2019 © 경기글로벌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