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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이민자의 한국생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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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09회 작성일 09-02-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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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노력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에요

 
레티응옥 투이(베트남)
 
저는 베트남 호찌민 쪈흥다우 가난한 마을에 작은 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매우 엄했지만 어머니는 매우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착한 언니와 장난감 만들기를 잘하는 큰오빠, 돈벌기를 좋아하는 둘째오빠, 장난 잘 치는 셋째 오빠와 행복하게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가난 때문에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어요. 제가 어려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몰랐어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사랑해요.
 
저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친구들과 지냈던 아름다운 기억이 있어요.
낡은 옷을 입었지만 우리는 왕자와 공주 같았어요. 왕관은 단풍잎으로 예쁘게 만들어서 가난한 동네에는 갑자기 왕궁이 되었어요. 재미있게 놀던 기억들이 생생해요.
저는 8살 때부터 가족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인력거를 운전하였고 형제는 중학교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빨래, 청소, 밥도 했었요.
조금이라도 가족들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어느 날 엄마께 말씀 드렸어요. “엄마... 요즘 날씨가 더워요. 사람들이 시원한 물을 많이 좋아해요, 엄마 나 돈을 벌고싶어요. 돈을 벌면 엄마는 나에게 아침식사비를 안줘도 돼요”라고 말하였더니 엄마는 웃었어요. 엄마는 “우리 막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엄마를 도와주는 것 이란다” 하며 반대를 하셨지요. 저는 자꾸 자꾸 하겠다고 하여 끝내 엄마의 도움으로 얼음장사를 하였답니다. 작은 돈을 벌었지만 그것은 내가 스스로 원했고 노력하여 번 것 이였기에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저도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집에까지 찾아오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답니다.
1995년 7월 베트남은 아세안에 가입하여 개방정책을 하게 되어 외국회사들이 베트남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 때부터 베트남 경제가 좋아졌어요.
22살 때 생활에 어려움 느껴 나는 취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공부를 많이 못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 했어요.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어요. “일을 얻으려면 용기를 가져야한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한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회사에 가서 눈을 감고 인터뷰를 받았습니다.
사장님은 “마케팅을 해 봤어요?” 제가 확실하게 대답했어요.
“네”
“얼마동안?”
“2년 동안 해봤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사장님은 저에게 “OK" 다음 주부터 일해요”라고 말씀 했습니다.
저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초등학교만 나왔고 마케팅 업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취직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하자! 하자!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스스로 격려하며. 마케팅을 어떻게 하는지 정말 몰랐어요. 그래서 서점에 가서 마케팅 책을 사서 읽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일하기 위하여 저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였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은 원래 장사가 잘 되지 않았던 곳인데 저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갑자기 수입이 50% 올랐어요. 사장님이 기분이 매우 좋아졌어요. 저에게 많은 칭찬도 해 주셨습니다.
저는 3년 먼저 들어온 동료보다 30% 더 급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인생 성공이었습니다. 저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알려 드릴께요. 그것은 친절하게 상품에 대한 설명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위로부터 시샘을 받으며 힘들게 일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쓴맛, 단맛, 매운맛을 보았어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동정 받는 것 보다 시기 받는 것이 더 낫다”고 기분이 좋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후로 시기하는 것은 버리고 잘하는 사람을 배워서 성공하고 싶다고...
 
저한테 사랑이 왔어요!
2002년 봄에 베트남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남편은 좀 무뚝뚝하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이 회사에 자주 방문하고 사랑한다는 편지와 장미꽃 100송이를 받으며. 그때 저는 감동을 받고 사랑을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첫사랑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위해 베트남을 7번 방문하고 그 긴 시간을 지금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결혼 전에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20살) 너무 많아서 저의 아버지는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께 이야기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 사람의 사랑을 포기 할 수 없어요.
이제까지 아버지 말씀을 잘 들었지만 이번에는 저의 행복을 찾아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요. 아버지 허락해 주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저는 형부, 언니, 오빠들한테 아버지를 설득하게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결혼을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백 살이 되도록 행복하게 살고 아들, 딸 낳아서 잘 키워서 부모 형제 없는 타국에서 무슨 일을 하든 건강하게 씩씩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여 주었습니다. 그런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먼 이 곳 한국에 시집와서 저의 신혼생활은 너무나 힘든 시기였습니다. 한국에 오자마자 저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임신을 하였지만 문화, 음식, 생활예절, 언어차이 때문에 울고 싶어도 마음대로 눈물을 흘릴 수 없었습니다. 바보가 되어 버린 나의 모습에 눈물은 가슴을 타고 흐리고 검은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하여 갔습니다. 남편은 건물 페인트작업을 하는 일을 하는 관계로 오랜기간 집을 비웠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쳐 갔지만 그때 저에게 힘을 준 것은 아기의 심장소리가 “엄마 힘내세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소리에 저는 기뻤고 행복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려움은 나한테 없다고... “하자! 하자! 노력하자!”
 
사람들은 여성들이 결혼하면 친정집이 그립다고...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낯설었던 이곳. 무서웠던 시어머니도 이제는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어머니는 외국에서 시집온 며느리라고 잘해주고 있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멀리 있는 친정(베트남)보다 가까이 있는 가족이 함께 해요.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님과 고모부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것이 많기에 열심히 배우고 싶어요.
더욱 노력할께요. 그리고 좋은 엄마, 좋은 아내,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정인이 아빠
우리 나이 차이가 많지만 정인이 아빠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어요.
제 마음도 당신보다 더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물질적은 선물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이 더 좋아요.
우리 백 년 해 로 해요. OK?
그래서 먼 고향 아버지께 약속을 잘 지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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